[View Point]제주 4.3 사건, 결고 잊지 말아야 할 비극 (발단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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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기슭에 동백꽃이 피는 계절, 제주는 아름다움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품고 있습니다. 매년 4월 3일이 되면 제주 사람들은 붉은 동백꽃을 가슴에 답니다. 총에 맞아 쓰러진 뒤에도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처럼, 억울하게 스러져간 생명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이름들을 함께 불러보려 합니다.


사건의 시작, 1947년 3월 1일

1947년 제주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 중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났습니다. 경찰이 그대로 지나치자 분노한 군중들이 항의했지만, 무장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주민 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에 항의해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민·관 합동 총파업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좌익 세력의 선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본토에서 경찰 응원대가 파견됐고,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제주로 들어와 검속과 탄압을 이어갔습니다. 검거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구금되었으며, 고문이 잇따랐고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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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 기마 경관


무장봉기와 초토화, 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분단을 고착화할 것이라 우려한 저항이었습니다.

4월 28일에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72시간 내 전투 중지 등에 합의했으나,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되었습니다.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 끝에 방화가 우익 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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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군사 진압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루어진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들은 산으로, 들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없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단 하나의 낙인으로 학살당했습니다.

사진 I 오라리 방화로 잿더미가 되어 가고 있는 중산간 마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러졌는가

공식적으로 확정된 희생자는 현재 14,822명입니다. 그러나 진상조사보고서는 실제 인명 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공식 집계조차 다 담지 못한 죽음들이 섬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연령별로 보면 유아 688명, 10~15세 399명, 16~19세 1,504명에 달하며, 어린이와 노인층 희생자가 14.5%인 2,089명이었습니다. 군인도, 경찰도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갓난아이도, 할머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강경 진압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습니다. 불탄 집터 위로 봄이 다시 와도, 돌아올 사람이 없는 마을들이 제주 곳곳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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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사람들


지워진 이름들, 50년의 침묵

사건이 끝난 뒤에도 고통은 계속됐습니다.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가족을 잃은 슬픔조차 입 밖에 낼 수 없었습니다.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픔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대물림되었습니다.

제주 한림읍 월령리에는 '무명천 할머니'로 불린 진아영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4·3 당시 총탄에 맞아 턱을 잃은 뒤, 얼굴을 무명천으로 감싸고 50여 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그녀의 삶은 제주 4·3이 남긴 상처가 얼마나 깊고 오래된 것인지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진실을 향한 길, 특별법과 공식 사과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습니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건 발생 5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25년 4월,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 아카이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최종 등재했습니다. 제주의 아픔과 진실 규명의 과정이, 이제 인류가 함께 기억해야 할 기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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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동백꽃을 달며

4·3특별법 공포 이후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망각이 아닙니다. 기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잘못된 권력 앞에 억울하게 쓰러진 사람들, 평생 이름조차 말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유해를 찾지 못한 가족들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동백꽃은 피었다가 지지 않고, 통째로 떨어집니다. 억울하게 스러진 생명처럼. 오늘 우리가 동백꽃을 가슴에 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붉은 봄이 다시 왔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 글은 제주 4·3 희생자들의 추모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더 많은 정보는 제주4·3평화재단(jeju43peace.or.kr)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제주4·3아카이브